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탕산 사건 (문단 편집) ==== 비상회의 소집 ==== 한편 당중앙이 사실상 장제스에게 장악되어 탄핵 등의 방안으로 장제스를 제재할 수 없음을 안 광동파 등은 북벌 이후로 강성해지는 장제스의 영향력에 밀리던 소외감까지 겹쳐 결국 대규모 반장활동으로 치닫게 되었다. 여기에 평소에 갈등관계인 개조파, 서산파 등도 힘을 합칠 기미를 보였다. 구잉펀 등은 장제스가 국민회의에 후한민이 출석할 것이라고 한 것에 기대를 보였으나 후한민이 끝내 출석하지 않자 광동파는 장제스가 식언했다고 더욱 불쾌해하고 반장의 태도를 굳혔다. 결국 이들은 장제스 하야를 위해 활동하게 되었다. 여기에 확대회의 실패 이후 은거했던 [[왕징웨이]]가 가세했다. 5월 1일 왕징웨이는 장제스를 비판한 후 장제스를 토벌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는 임시전국대표대회를 소집하여 모든 혁명동지들의 단결을 촉구했다. 5월 3일 천지탕이 장제스 탄핵 지지를 선포했고 곳곳에서 광동의 민중단체들이 반장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천지탕은 장제스가 하야하지 않으면 정의를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라고 장제스를 위협했다. 광둥을 기반으로 실질적인 무력을 갖추고 있던 천지탕이 가세하자 반장파들은 크게 고무되었고 장제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 천지탕이 반장파에 가세할까봐 가뜩이나 노심초사하던 장제스는 일찍이 그에게 광둥성 정부 주석 자리 등을 제안하며 회유한 바가 있었으나 천지탕은 반장의 기치를 들었고 장제스는 큰 타격을 받았다. 장제스는 광동사태가 절망적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시인했다. 천지탕이 반장을 천명하자 [[리쭝런]], [[바이충시]] 등의 광서파들이 가세하기 시작했다. 5월 11일 리쭝런 이하 광서파들이 천지탕의 반장 통전에 호응하며 장제스 탄핵을 외쳤다. 결국 장제스는 무력 옵션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호남과 강서에 병력을 증강시켰다. 또한 국민회의 준비도 진행했다. 반장파 내부의 여러 반목하는 파벌들은 광서파, 왕징웨이의 참여 등을 놓고 반대파를 설득하는 등 내부 결속 움직임을 다졌고 왕징웨이 등도 자신을 적대하는 광동파 회유를 위해 반장에 앞장섰다. 탕산 사건으로 촉발된 반장운동은 과거 확대회의의 통합된 반장운동을 뛰어넘는 신속함과 단결성을 보여주었다. 5월 24일 천유런, 쉬충즈 등과 함께 홍콩에 도착한 쑨커는 왕징웨이의 집에서 반장운동의 구체적인 방향을 토의했다. 광저우 국민정부 조직을 위한 당부비상회의와 계획도 여기에서 논의되었다. 5월 24일 왕징웨이와 쑨커는 반장 진영 인사들이 연명하여 장제스에게 당무, 내정, 군사, 재정 방면의 과오를 책임지고 48시간 내에 하야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장제스가 이를 무시하자 5월 27일 왕징웨이와 쑨커는 중국구민당중앙집,감위원회비상회의를 개최하고 광저우 국민정부의 성립을 선포했다. 여기까지 보면 반장 세력들이 일치단결한 것처럼 보이지만 역시 오랜 감정의 골이 메워지진 않아서 천지탕은 광서파를 경계했고 후한민은 왕징웨이의 개조파 인사들의 광저우 행을 막으라고 천지탕에게 지시하여 [[천궁보]] 등의 개조파들은 광저우에 들어오지 못했다. 게다가 이들의 목표도 달라서 구잉펀은 후한민의 석방만을 원했지만 왕징웨이는 정권을 얻으려는 것이 목표였다. 반면 천지탕은 광둥에서의 독점적 지위 확보가 목적이었다. 또한 서산파는 비당권파의 지위에서 벗어나는 것을 추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